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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시 런던 카지노] 복거일 - 나는 오늘 서정적이다

복거일 / 2020-05-12 / 조회: 5,973



나는 오늘 서정적이다


나는 오늘 서정적이다.

저리 흐드러진 철쭉 화사한 빛깔을

내 깃발로 펼치고 눈에 세상을 한껏 담으면

마음은 이리 가볍게

보얀 늦봄 하늘을 난다.

한사코 붙잡는 땅의 중력을

잘라도 잘라도 붙잡는

이 끈끈한 인연들을 벗어나는 데

서정만한 것이 있으랴.

나는 오늘 서정적이다.


죽음은 없다.

하늘 아래 어디에도 죽음은 없다

삭은 목숨이 문득 꺼지는 순간이

그 아득해지는 순간이 있을 따름.

내 몸으로 구현된 질서 한 무더기가

사십억 년 다듬어진 모습의 한구석이

허물어지고 있을 따름.

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군사들을 다시 모아

검은 군사들과 맞서는 데

서정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.

나는 오늘 서정적이다.


우리 모두 알지

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.

한 번 흘러간 물

거슬러 오는 법 없고

소리 없이 진 꽃잎

인연의 가지 위로 올라앉을 리 없고

저 멀리 오똑한 연희고지

거기 묻힌 젊은 병사들

어느 아득한 세월이 흘러도

땅속에서 부스스 일어나

끊어진 젊음을 이을 리 없고.

우리는 잘 알지. 그리고 엔트로피를 근거로 내놓지.

질서는 허물어지기 마련이라고.


그러나 이 자리에선

철쭉꽃 흐드러지고

비탈 타고 꿩 울음 들리고

엄마 치맛자락 뒤로 숨는 저 수줍은 애기에겐

내가 그래도 가장 흥미로운 풍경인

이 환한 자리에선

난 의견을 좀 달리하고 싶네, 내 비록

열역학 제이법칙을 존중하지만.


흘러간 세월 다 불러오고

저 애기의 화사할 봄철들도 불러오고

가슴 활짝 열어 모두 받아들여서

이 우주의 이치를 잠시 멈추게 하는 이 자리

허물어지는 한 줌 질서가

문득 서늘한 날로 서도록 하는 데

서정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.

오늘 나는

서정적이다.


지은이: 복거일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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